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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스X마키아스 루퍼스X유시스
섬의궤적3 3장 해항도시 에피소드 기반 AU/ 시체 묘사 주의 / 플레이 key 네타 주의
진행되는 에피 속에 무리하게 끼워 넣으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게 좀 있긴 한데, 어차피 AU니까 그러려니 해주십쇼.
배드엔딩 루트1 정도로 생각하면 편할 듯. 배드엔딩은 아닐거지만! <-
전편 중 만개(滿開)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전편 다 보기 귀찮으신 분은 그것만 보고 오셔도 무방합니다.
성도력 1205년 6월 15일 오후 04:00, 바레아하트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유시스 알바레아는 그제서야 서류 더미에서 눈을 떼고 잠시 허공에 눈길을 두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메이드가 홍차를 내릴 준비를 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에나멜 법랑 포트에 찻잎을 넣고 함께 가져온 주전자에 담긴 펄펄 끓는 물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그러고 보니 저 메이드는 일전에 새로 들어온 사용인이다. 나이는 십대 중반 정도. 어려서 그런지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았다. 처음 차를 내릴 때 포트를 덥히지도 않은 데다가 이미 끓이고 나서 한 김 빠진 물을 붓는 바람에 부친인 헬무트 공작에게 어지간히도 욕을 들어 먹었었지. 얼핏 보니 오늘은 꽤 제대로 된 모양새이다.
짧은 회상을 마친 그는 꾸벅거리며 물러나는 메이드에게 손짓으로 감사를 표했다. 소리 없이 문이 닫히고, 유시스는 어린 소의 가죽으로 만든 소파 위에 앉아 포트에 담긴 홍차를 잔에 따랐다. 투명한 호박색이 순백의 찻잔 안에서 별무리처럼 일렁인다. 이맘때의 차는 4~5월에 갓 딴 잎으로 만들어 가장 맛이 좋다. 생산지는 캘버드 공화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다. ‘제국 대귀족의 애호품인데 공화국제가 제일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군.’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키아스 레그니츠는 보통 홍차를 마시지 않지만 권하는 것을 눈 앞에 두고 내칠 만큼 모질지도 않았다. 커피는 혁신파의 상징 같은 것인가? 그 <철혈재상>도, 그의 맹우인 칼 레그니츠 제도지사도, 그 아들인 마키아스 레그니츠도, 다 커피를 마신다. 마키아스의 경우는 그냥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귀족에의 반발일 수도 있겠고. 그래도 자신이 방문할 때에는 어김없이 어디선가 공수해온 최고급 찻잎을 준비해 두는, 그런 배려가 원래의 그다운 것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쭉 유시스 알바레아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리라.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유시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순간 어디선가 ARCUS의 착신음이 들렸다. 어디에 뒀더라. 유시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한나절을 쏟아 부었음에도 아직 끝없이 쌓여있는 서류더미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만년필과 함께 책상 한 구석에 놓아 둔 단말기를 찾아내어 폴더를 열었다. 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레그니츠?”
“여어, 미남 오랜만. 잘 지냈나?”
미남이라니, 이 녀석 갈수록 쓰는 단어가 노골적이다. 유시스는 짐짓 언짢은 표정을 했다. 화면 속 그가 입고 있는 감청색과 옅은 잿빛을 띤 히아신스 블루 패턴의 제복은 처음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법 감찰원에 들어갔다고 했던가, 그 제복이겠군. 제법 능숙하게 세팅된 암녹색 머리카락과도 합이 잘 맞다. 저 머리는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게 흠이긴 하다만.
“요새 경황이 없어 미안하군. 그쪽으로 보냈던 취업 선물은 받았나?”
“아아, 그거야 잘 받았지. 아니 그런데… 또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서 보냈냐,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는 안 한다.”
“후후, 거기에 보태서 좀 더 보낼까 했는데. 직접 못 보는 대신에.”
최고급 아타셰 케이스와 공방에 특별주문을 넣어 이름자를 금박으로 각인해 놓은 만년필, 또 뭘 보냈더라.
“뭐, 아쉽게도 넥타이 핀은 할 겨를이 없다. 이해해라. 나머지는 정말 잘 쓰고 있어.”
그랬다. 은으로 된 바디에 그의 머리카락, 눈동자 색과 같은 에메랄드로 장식된 넥타이 핀을 보냈었지. 다 같아 보이는 초록색 중에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고르고 골라서. 전 같으면 또 귀족의 돈지랄이 시작된 거냐고 난리법석을 떨 만도 한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찡그린 것 보다 어딘가 힘없이 웃는 얼굴이 더 자연스러워진 그가 유시스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쪽은 영방 회의 준비로 한참 바쁘겠군.”
“말도 마라.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하, 그거 고생이야. 아, 그나저나 지난달에 크로스벨로 출장을 다녀왔다만…”
크로스벨. 그 단어를 듣자마자 어두워진 유시스의 얼굴이 화상으로도 티가 났는지, 마키아스가 잠깐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형님을 뵈었지. 뭐, 일 때문이었지만.”
“…고전했겠군.”
“그러게나 말이다. 인생의 쓴맛을 거기서 다 보고 왔다. 하아…”
“무슨 일이 있었나?”
“뭐, 네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야.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자. 이번 영방 회의의 최대 안건은 차기 카이엔 공작 선출 건이겠지?”
“그렇다만?”
“그… 혹시, 카이엔 공작에게 알려지지 않은 먼 친척이 있나? 십대 정도의.”
“먼 친척? 갑자기 그런 건 왜…”
“아니, 역시 됐어. 미안하다 쓸데 없는 걸 물어서.”
마키아스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내가 먼저 걸어놓고 미안하지만 이제 곧 기차가 올 시간이라서 말이야. 다음에 또 연락하지. 잘 지내라 유시스.”
“잠깐, 레그니츠!”
“…몸조심해라."
화상 너머 시종일관 맥 빠진 얼굴이던 마키아스의 눈동자가 마지막 순간 잘 벼린 칼처럼 날이 섰고,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손에 든 단말기를 내려놓고 유시스는 마키아스의 말을 곱씹었다. 확실히, 이번 영방 회의에서 지난 내전의 주모자로 구속 중인 카이엔 가의 차기 공작을 선출할 것이다. 다만 현재 후보로 입회된 자는 그 무능한 발라트 후작이지만. 감찰원에 들어가 있는 마키아스라면 그 정도의 정보는 지나가는 심심풀이용으로라도 다 귀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그 질문은 다르다.
도대체 이 멍청이는 형님에게 무슨 말을 들은 것이고,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애당초 자신은 지금 마키아스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제도에 있다면 차라리 좋을 것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6월 10일 오후 02:00 크로스벨, 오르키스 타워
토르즈 제2분교 특무활동을 이유로 크로스벨에 와 있던 린 슈바르처에 협력하여 <결사>와 대립한 지도 벌써 몇 주 전의 일이 되었다. 크로스벨 총독부가 감찰을 방해하려 맡긴 잡무를 겨우 끝낸 후, 제도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더 루퍼스 알바레아 총독에의 방문 신청을 위해 오르키스 타워 안내 데스크에서 필요 서류를 제출하던 마키아스는 문득 커다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총독 각하?”
“이거, 마키아스 군. 보아하니 업무는 끝난 모양인데.”
“아, 네. 최종 보고를 드리려 합니다만.”
“어차피 올라가던 참이니 같이 가도록 하지. 따로 방문 신청을 할 필요는 없네.”
데스크에 건네려던 서류를 그대로 거둬들이며 마키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화려하고 위압적인 분위기. 가늘고 공격적인 턱 끝이 여유롭게 움직인다. 저 반짝이는 금발에 보석같이 눈부신 미소가 세간에서야 보기 좋다고 사진집도 내려 하고 그러는 거겠지만, 마키아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 No.2일 뿐. 게다가 어째서인지 저한테는 필요 이상으로 묘하게 친근하게 구는 것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섭다. 방금도 성이 아니라 그냥 이름을 불렀고.
끝없이 올라가는 투명한 마천루의 엘리베이터 안에 수행원도, 감찰원의 선배도 없이 루퍼스 총독과 단 둘. 빳빳하게 세운 망토 깃에 반쯤 가려진 총독의 옆모습을 힐끔 쳐다보던 마키아스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뒤를 돌아본 루퍼스 총독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똑같은 태고의 호수 같은 눈동자. 말 없이 에스코트 하는 손짓에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마키아스는 그 뒤를 따라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 후로는 쭉 건조한 업무보고가 이어졌다. 감찰 성과는 제로다. 그야 이 루퍼스 알바레아를 상대로 뭔가 하나 얻어 걸릴 거라는 희망 따윈 애당초 하지도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는 듯하던 루퍼스 총독의 눈길이 별안간 마키아스의 오른손 검지로 옮겨갔다. 마키아스는 들고 있던 서류로 어색하게 오른손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낯이 익군.”
“네?”
“자네 손의 그 반지, 낯이 익어.”
“그, 그렇습니까…”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죽어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거야 낯이 익으시겠죠. 그 집안 물건인데… 마키아스는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반지를 빼놓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아니, 일단 반지 자체를 의식하지도 못했던 것이 더 문제다.
“보고는 그쯤 하면 충분하네만. 더 할말이 있지 않나?”
역시,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으니. 유시스에 대해서.”
6월 17일 오전 10:30 라마르, 서 라마르 가도
라마르의 공기는 추를 매단 듯 무겁고 짙은 소금 냄새가 났다. 린 슈바르처는 달리던 도력 바이크의 브레이크를 부드럽게 밟았다. 멈춰 선 가도의 얕은 언덕 너머 펼쳐진 검푸른 바다가 장관이었다. 그는 인솔하던 학생들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그 풍경을 오벌 카메라의 렌즈 속에 담았다. 토르즈 사관학교의 동창이자 현 제국시보의 기자 비비에게는 매번 이렇게 훈련 중 좋은 풍경 사진을 찍어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진을 송신함과 거의 동시에 답신이 왔다.
「린, 사진 고마워.」
“별거 아니야. 분교 훈련차 라마르에 온 김에 좋은 풍경이 보여서 찍어봤어.”
「응, 덕분에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 거 같아. 그런데 말이야… 며칠 전에 좀 신경 쓰이는 소문을 들어서.」
신경 쓰이는 소문? ARCUS 액정 속 비비의 얼굴은 평소의 발랄한 그녀답지 않게 더없이 진지하고 조심스러웠다. 린은 그녀가 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밖으로 들리지 않게 단말의 볼륨을 줄였다.
* * *
“유시스!”
올디스에 도착하자마자 린은 전달받은 모든 지원요청을 무시한 채 영방 회의 준비를 위해 올디스에서 대기 중인 유시스를 찾아갔다. 서 라마르 가도에서 비비에게 들은 ‘소문’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이 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을까 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실상은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린, 방금 전에도 연락을 받았다만 대체 무슨,”
“유시스, 최근 마키아스와 연락했던 게 언젠지 기억하고 있어?”
“분명 이틀 전이다만… 무슨 일이지?”
드물게 그 <잿빛 기사>가 당황한 기색을 만연히 드러내며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와서는 그의 이름을 꺼낸다. 유시스는 문득 이틀 전에 찜찜하게 끊겼던 마키아스와의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연락이 되지 않아. 혹시나 싶어서 발리마르에게 부탁해 준기동자인 마키아스의 기척을 찾아봐 달라고 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고 했어.”
“…그럴, 수가.”
뭔가 잘못된 거겠지. 유시스는 황급히 ARCUS를 꺼내 그에게 연락했으나 아예 신호조차 연결되지 않았다. 단말을 잡고 있는 그의 손 끝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여기로 오는 길에 비비에게서 급히 연락을 받았어. 혹시나 싶어서 너한테도 물어본 거였는데…”
“레그니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틀 전, 오르키스 타워에서 투신 자살 사건이 있었다고 해. 한밤중이라 거의 목격자는 없었지만 타워 관계자를 통해서 어렵게 비비가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설마, 아닐 거야. 유시스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망자의 인상착의가 마키아스와 일치한다고 해.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당연히 그럴 리 없지!”
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시스가 소리쳤다. 마키아스 레그니츠가 자살이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호기롭게 뱉은 말과는 다르게 손 끝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유시스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난폭하게 로비 바닥에 던져 버렸다. 곧바로 저택의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등 뒤에서 패트릭이 다급하게 외쳤다.
“어딜 가는 건가 유시스!”
“크로스벨로. 전용기를 준비해라, 지금 당장!”
영방 회의를 목전에 두고 사대귀족의 주축인 유시스 알바레아가 라마르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서 그를 말리지 못했다. 졸지에 그가 떠난 사유를 다른 적당한 걸로 꾸며내야 할 위기에 처한 패트릭만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침울한 린의 얼굴과 멀어지는 유시스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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