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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오전 01:55, 크로스벨, 오르키스 타워
나중에 부르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일 줄이야. 별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타워의 시린 불빛만이 바닥을 비춘다. 마키아스는 옥상 난간을 잡고 선 채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250 에이쥬의 아찔한 높이.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확실하게 죽겠군.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손바닥에 저절로 땀이 배어 나온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가벼운 발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어, 오랜만이군.”
“렉터 아란돌 소령?”
“왜 내가 여기 있냐는 표정인데? 뭐, 총독 나리는 좀 바쁘대서 말이야. 참나, 곧 라마르에도 가야 하는 사람을 어지간히도 부려먹는구먼.”
라마르, 그렇군. 이번에도 ‘그런’ 식이군. 토르즈 제2 분교의 목적지는 이렇게 정해진 건가. 마키아스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를 마주보고 섰다. 렉터가 온 것은 딱히 상관없지만 그 옆에 있는 물체가 더욱 신경 쓰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거대한 ‘관’이었다. 성인 남자 하나는 족히 들어갈 법한.
“전에 총독 나리한테 권유는 받았겠지?”
“<아이언 브리드>의 건인가.”
“그래서, 대답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만. 그 제의는 <철혈재상>의 것인가, 아니면 루퍼스 알바레아 총독 개인의 것인가?”
“좀 애매하긴 해. 철혈 할배는 ‘알고’ 있지만, 생각 자체는 그의 것이 아니지. 총독 나리 개인적인 사정이랑 겹쳐서 말이야.”
“개인적인 사정이란 건 그의 동생, 유시스 알바레아를 말하는 거겠군.”
“아무래도 혈육간의 정이란 건 생각보다 끈끈한 모양이더라고.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겨서는 의외로 브라더 컴플렉스인 모양이야.”
그래서, 받아들일 건가? 렉터가 재차 물었다. 마키아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선약’을 깨트릴 사람은 못되어서 말이야.”
“린 슈바르처… 아니, 구7반의 ‘약속’ 말이군. 뭐, 그렇게 나오리라곤 생각했지만. 사실 내 입장에선 허드렛일 좀 덜어줄 후배가 하나 있었으면 했던지라 아쉽긴 하네. 진심으로.”
아아, 언제까지 이렇게 뺑이 도는 월급쟁이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맥 빠진 푸념을 늘어놓으며 나른하게 팔을 머리 위로 뻗음과 동시에 그의 눈빛이 변했다. 마키아스는 한 발 물러나며 품 안에 숨겨 들어온 권총 한 자루로 급히 손을 뻗었다. 여차하면 쏘고 도망갈 생각이다. 피한다 하더라도 거리만 잘 유지하면 이쪽이 불리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렉터의 입에서 나온 묘한 말이 무장된 그를 흔들었다.
“슈바르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에게는 고생 깨나 시킬 예정이라서 말이야. 그다지 기대하진 않는 게 좋아.”
“…무슨 소리지?”
“그보다 지금은 본인 걱정이나 하셔.”
“……!”
렉터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마자 허공에 나타난 전술각에 마키아스는 손 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결박 당했다. 빌어먹을, 이런 거였나. 아까부터 저 ‘관’이 신경 쓰이더라니. 렉터 혼자의 힘으로 들고 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렉터를 향한 분노보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이가 갈렸다.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아줘. 나 같은 말단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단 말이지. 응? 이걸 보고 있는거야?”
렉터는 제 옆에 있는 관을 가볍게 툭툭 쳤다.
“아, 깜빡 할 뻔 했네. 총독 나리가 신신당부 했었는데. ‘유품’이 될 만한 것을 꼭 받아오라고.”
“하, 유품이라.”
“그렇게 무섭게 노려보지 마. 진짜로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좀 봐줘.”
마키아스는 고개를 떨군 채로 입술을 짓이겼다. 유품. 말할 것도 없지. 손가락만 움직여 오른손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빼내 그의 앞으로 던졌다.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입술로만 웃어 보이던 렉터의 얼굴이 반지를 받아 들자마자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하… 하하, 으하하핫!”
“뭐가 우습지?”
“아니, 이거 실례. 사실 나 말이야, 총독 나리한테서 듣긴 했지만 좀 긴가 민가 했었거든. 어째서 린 슈바르처던가, 하여튼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인 걸까 하고 말이야. 하, 그랬는데…”
걸작이군. 어쩐지 씁쓸한 표정으로 그는 반지의 안쪽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입 다물어. 내 손에 총이 있었으면 널 이미 쏴 버렸을 거다.”
“그래, 그랬겠지. 아무튼 이제 한동안 내 얼굴은 안 봐도 될 거야. 좀 실험해 보라고 한 것도 있고 겸사겸사긴 하지만…”
안주머니의 케이스를 열어 주사기 하나를 꺼내든 렉터가 천천히 마키아스에게 다가갔다. 이런 건 좀 그렇군. 내키지 않는 얼굴로 렉터가 중얼거렸다. 주사기 속 붉은 액체가 서서히 마키아스의 목줄기에 꽂힌 바늘을 통해 사라져 간다.
해방된 마키아스의 몸이 서서히 힘을 잃고 쓰러져 갔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멈춰진 사진 속 풍경처럼 관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온 자신의 얼굴을 끝으로 마키아스는 정신을 잃었다.
* * *
도력등의 스위치가 켜지듯이 순간 시각이, 다음으로는 청각이 돌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먼 발소리,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 흐르는 물 소리, 자신의 느린 심장 소리가 어지러이 섞여 귓가에 울린다. 마치 차가운 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확실하지 않은 시야 속에 소리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마키아스는 힘겹게 눈을 떴다. 눈 앞의 어둠에 익숙해지자 그의 주변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풀이 보였다. 붉은 플레로마 풀. 제국의 이변을 상징하는 그 붉은 풀들이 그의 주변을 빠짐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환각인가, 가까스로 손가락을 움직여 눈 앞의 풀을 만져보았다. 환각이 아니라 실제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썩은 물과 오래된 흙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공기는 어딘가 낯이 익었다. 나고 자란 공간과 같은 익숙한 공기.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몸 속에 주입된 붉은 약물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이 너무 느리게 뛰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죽이지는 않는다는 거냐, 죽는 것보다 못한 꼴로 사람을 이런 시궁창에 던져놓고서는 웃기지도 않군.
그 때였다.
“…어디서부터 인과가 크게 비틀렸는지 찾아봤더니, 원인은 네 녀석이었구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하고 있으나 깊은 세월이 느껴졌다. 마키아스의 눈동자에 금발의 소녀가 비쳤다. 아무 것도 없던 허공에서 그녀의 눈동자 색과 같은 심홍색 마도 지팡이가 생겨났다. 작은 손으로 그것을 휘두르자 주변에 있던 붉은 풀들이 보이지 않는 불에 타 없어져 버렸다.
마녀. 마키아스는 곧 비타 클로딜트와 그의 급우인 엠마 밀스틴을 떠올렸다.
“네 목숨을 걸고 바로잡아라. 할 수 있겠느냐, 수도의 아이여.”
붉은 마도 지팡이는 이제 똑바로 그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죽는다면 금발 미인의 품 속이 좋겠어. 이딴 썩은 고대의 무덤 속이 아니라. 마키아스는 대답 대신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대답은 무의미했다. 작은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지팡이로 한 차례 땅을 짚었다.
6월 19일 오후 01:30, 바레아하트
북쪽이 불길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북방전역을 시작으로 한 민중의 두려움은 거의 전쟁터가 되어 버린 라마르의 소문을 거쳐 더욱 부풀어올랐다. 크로스벨의 시민들은 저마다 생각은 달랐지만 새로이 취임한 아름다운 총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호의적이었다. 어차피 민중은 그 정도의 존재였고,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항상 있는 것이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던지는 자들이. 일찍이 제국에 대항하려 했던 <제국해방전선>의 개죽음을 목격하고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이. 영토와 가족을 잃고 제국 땅에 떠도는 북쪽의 엽병들처럼.
루퍼스 알바레아는 이제까지 그러한 불길한 존재들을 가차없이 박살내왔다. 은밀히, 어느 이의 귀에도 들리지 않게, 오늘을 살아가는 표면에 있는 자들에게 절대 보이지 않게.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바레아하트의 저택에서 자살을 시도한 자신의 동생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딛고 서 있는 바닥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느꼈다. 어째서, 그 아이는 누구보다 영특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아이일 텐데. 자신이 그렇게 키웠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탑 안에서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 끝을 조금 잘라내어, 그 위태로움이 본인이 없어도 유지되도록. 언제나 불안한 듯 내리깐 푸른 눈동자의 흐린 그림자가 걷히지 않도록.
그러나 틀렸다. 어느 샌가 그의 동생은 그의 손을 떠나서 이름과 목숨을 다 줘버릴 상대가 생겨버렸던 것이다. 솔직히 놀랐다. 그 정도일 줄은. 마키아스를 영입하여 유시스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데는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를 ‘지워’ 버리면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반 정도는 먹혔다. 적어도 라마르에서 그를 불러 들이는 데는 성공했으니. 조각난 더미 바디를 보여준 것이 실수였나?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긴밀히 사람을 보내 그를 놔둔 장소를 살펴보도록 했지만 돌아온 것은 ‘확인불가’라는 보고 한마디뿐. 어째서, 주입한 약의 양을 생각하면 지금 시점에서 절대 멀쩡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을 터인데, 도대체 어디로.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바레아하트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그는 줄곧 생각했다. 그 아이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보험으로 거의 가사 상태로 만들어 둔 마키아스도 사라졌다. 사라진 보험은 더 이상 보험이 아니다.
저택 안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이었다. 홀에 마중 나온 사용인들에게 유시스의 안부를 묻자 그들은 하나같이 대답하기를 피했다. 루퍼스는 작게 혀를 차며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유시스…”
누구든 이 아이의 얼굴을, 그 눈을, 눈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혈색 좋은 뺨은 흙빛으로, 빛으로 일렁이던 물빛 눈은 그림자에 모두 가리어 이른 삼월의 비에 떨어진 목련처럼 그의 동생은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유시스, 사랑하는 내 아우야. 루퍼스 알바레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쥔 채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와 함께 크로스벨로 가자꾸나. 잠들어 있는 그에게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인사해야지…”
“…여태 장례도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제서야 유시스가 입을 열었다. 말라붙은 입술이 가는 숨을 내쉬었다. 참담한 표정으로 루퍼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장례 따위는 치를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어딘가에 살아있으니까.
결국 그는 그의 동생에게 끝까지 진실을 고하지 못했다.
6월 19일 오후 02:50, 바레아하트 공항
마녀의 마법진이 사라지고 전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마키아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넓은 홀의 사각지대에 그가 서 있었고, 정면의 카운터와 로비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공항? 잠깐, 그렇다면 여기는 혹시… 그는 빛이 새어 들어오는 커다란 입구 앞 간판을 쳐다보았다. 바레아하트 공항, 드디어 도착한 건가 비취의 공도에.
순간 갑작스럽게 그의 머릿속으로 엄청난 소음이 들이닥쳤다. 전위해 오기 전과 같은 현상이었다. 다만 이곳은 그곳에 비해 사람이 몇 배로 많았다. 완전히 개방된 공간 안에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여과 없이 울려 퍼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스치는 옷깃의 마찰음,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그 휘몰아치는 소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번뜩이는 누군가의 살의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크로스벨을 위하여.’
마키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 위, 시선 너머 터미널에 낯익은 색의 비행정이 보였다. 틀림없다. 알바레아가의 전용기다. 살의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커져갔다. 마키아스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의 동생을 부축하고 있는 루퍼스 알바레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맞은편에서 가까워지고 있는 남자가 품 안에서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푸는 쇳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들려왔다.
“각하, 유시스를 안으로!”
“…마키아스 군?”
“어서!”
갑자기 나타난 마키아스의 모습에 놀란 듯한 루퍼스는 곧 무섭도록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 후 유시스를 안고 전용기 안으로 몸을 숨겼다. 루퍼스 알바레아를 향한 분노가 총구에서 불을 뿜는다. 동시에 마키아스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목표물을 잃은 총알은 곧장 마키아스의 어깨에 날아와 박혔다.
“마키아스, 마키아스!”
루퍼스의 품 안에서 유시스가 소리친다. 마키아스는 휘청거리는 한 쪽 다리를 지면에 딛고 간신히 섰다. 총독을 암살 하려던 자는 이미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곧 경비원들이 올 것이다. 이제 됐다. 마키아스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그게 뭐냐 유시스, 한동안 못 본새에 완전 엉망이구만…"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로 젖은 어깨가 뜨겁다. 심장박동이 다시 느려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마키아스의 몸이 서서히 지면으로 가라앉았다.
유시스. 너는 움직이지 않는 축이고, 나는 네 바깥을 도는 다른 한 축이다. 우리는 둘이되 하나의 컴퍼스처럼, 너는 그 자리에 나를 지탱하며 서 있고 움직이는 것은 나다. 기억해, 얼마나 큰 원을 돌게 되건 간에 나는 네게 돌아갈 거야. 반드시.
그러니까 괜찮아. 그런 얼굴 하지마.
방금 전까지 그의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모든 소리들이 사라지고, 더 이상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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